#1 역사, 조선 제19대 숙종의 환국정치 - 지식창고

역사, 조선 제19대 숙종의 환국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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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9대 왕 숙종 어진이지만 불에 타 숙종의 모습은 볼 수 없다.현종과 명성왕후의 외아들로 원비는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계비는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제2계비는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이다.  재위기간 중 강해진 신권을 줄이기 위해 환국정치를 통해, 서인과 남인간의 세력을 조절하고 왕권을 강화시켰다. 45년 10개월을 재위하여 조선 역대 임금들 중 영조 (51년 7개월) 에 이어서 두 번째로 재위기간이 길며, 영조(81세), 태조(72세), 고종(67세), 광해군(67세), 정종(62세)에 이어 여섯 번째로 장수한 왕이다.

조선 제19대 숙종의 환국정치

숙종시대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 간의 정쟁이 가장 심했던 기간이다. 숙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계속되던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조선 사회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왕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중전과 후궁들에 대한 애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숱한 옥사를 유발하여 치세에 흠을 남기기도 했다.

 

숙종의 치세기간(1661~1720년, 재위기간 : 1674년8월~1720년6월, 45년10개월)은 조선 중기 이래 계속 되어온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면서 붕당 내부의 분열과 자체 파탄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러한 붕당의 자체 파탄을 심화시킨 사건이 현종이후 숙종 대까지 계속 이어진  예송(禮訟-궁중의례 문제)이었다. 숙종은 즉위하자 곧바로 현종시대 정쟁의 핵심 사안이었던 이 예송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숙종은 정국 전환을 뜻하는 환국(換局)이라는 방법으로 세 번에 걸쳐 정권을 교체하면서 붕당 내의 대립을 촉발시켜 그 반대 급부로 군주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여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특정 파당이 지나치게 힘이 강해지면 대출척을 감행함으로써 정국의 전환을 꾀하곤 하였다. 숙종이 환국정치를 택하게 된 것은 왕권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정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인이 대거 축출당하는 1680년의 경신환국, 왕자 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서인이 제거 당하고 남인이 다시 집권하게 되는 1689년의 기사환국,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통해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의 소론이 집권하게 되는 갑술환국, 그리고 이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발행한 1701년 무고의 옥 등이 대표적인 것들이다.

 

경신환국(1680년)

경신환국은 1680년 (숙종 6년) 경신녕에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축출된 사건을 일컫는다. 남인은 1674년의 제 2차 예송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그해 즉위한 숙종은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의 추천에 따라 그녀의 종질 김석주를 요직에 기용하여 남인을 견제하였다. 사건의 발단은 유악(油渥: 왕실 사용의 기름질칠한 천막)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마침 비가 내려 숙종은 유악을 남인의 영수인 허적의 집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왕실의 물건을 왕에게 보고도 하지않고 이미 빌려간 상태였다. 숙종은 이 일을 남인이 권세를 믿고 왕을 업신여긴 행동으로 단정하면서 남인이 거의 차지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에게 넘겨버린다. 남인인 허적의 유악 남용사건으로 서인이 다시 중앙 군영의 군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허적, 윤휴, 이원정 등 남인 중진들이 대거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이로써 남인을 대거 축출되고 김석주 등 서인이 대폭 등용되어 조정은 서인에 의해 장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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