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사 조선16대왕 인조,정묘호란,병자호란,삼전도,업적 - 지식창고

역사 조선16대왕 인조,정묘호란,병자호란,삼전도,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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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6대 왕 인조

조선의 제16대 왕 인조는 1623년~1649년 재위하였는데, 가족으로는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원종으로 추존)이며 어머니는 인헌 왕후이다. 비는 한준 겸의 딸 인열왕후, 계비는 조창원의 딸 장렬왕후이며, 자식으로는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의 자녀를 두었다. 1607년(선조 40) 능양군으로 진봉 되었다가, 선대왕인 광해군의 중립정책에 맞선 서인인  김자점, 이괄 등이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내쫓고, 제16대 왕위에 올랐다.

 

 

정책 및 정묘호란, 병자호란

광해군 때는 중국의 명나라와 위세를 떨치고 있던 금나라(오랑캐)에 대해 중립정책을 써서, 금나라(오랑캐)의 침입을 막아왔지만,  전통적으로 명나라를 숭상하던 조선의 선비들은 이에 반기를 들고 어떻게 오랑캐인 금나라와 화친을 맺을 수 있냐고 반기를 들어 반정을 일으켜서 광해군을 축출하고, 다음 왕으로 인조를 세워서 반금친명 정책을 썼다. 이에 1627년 금나라의 후손인 후금의 침입을 받게 되자 할 수 없이 형제관계를 맺어 후금을 형으로 대했는데, 이것을 정묘호란이라고 한다.

 

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선의 조정은 은연중에 친명적 태도를 취하게 되자, 1636년 국호를 청나라로 고친 후금의 태종이 이를 이유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재차 침입하자,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에게 항복하게 되었고, 군신의 의를 맺고 자녀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청으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였는데, 이것을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병자호란은 인조 14년 1637년 1월 3일부터 1637년 2월 24일까지 이루어진 조선에 대한 청의 침략전쟁으로 병자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병자호란이라고 일컫는다. 

 

삼전도의 굴욕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는 청의 압박에 굴복하여 한강유역인 삼전도에서 청의 사신에게 절하는 치욕적인 항복의 예를 행하였는데,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한다. 병자호란은 1627년 후금이 일으킨 정묘호란 종전 후 10년 만에 발발한 전란으로서 임진왜란 이래 동아시아의 판도를 다시 한번 크게 뒤바꾼 사건이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침을 받아왔었지만, 그때마다 전쟁영웅들이 나타나서 외침을 막아왔었다. 예를 들어, 고구려시대에는 수나라와 당나라가 수백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을 했을 때에도 연개소문, 을지문덕 장군 등이 있어서 외침을 막아냈고, 고려시대에는 강감찬 장군이 거란의 침입을 막아냈으며 조선에서는 일본의 침입을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 한산도대첩등 해전에서 전승을 하고, 의병 등이 일본의 침략을 막아냈지만, 인조시대의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인해 청나라에 항복을 하고 삼전도의 굴욕으로 이어진 역사는 참으로 치욕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선대왕인 광해군은 일본의 침략에도 선조왕이 의주로 피신함에 따라 분조왕으로 전쟁 현장을 지키며, 병사와 백성들을 독려하고 일본 왜군에 맞서 싸우고 혁혁한 공을 세웠고, 명나라와 후금(청)과의 사이에서 후금의 급속한 전력확장을 예측하여, 후금(청)과도 우호적인 중립 외교정책으로 우리나라 조선을 지켰지만, 서인반정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강화도에 유배되어 생을 마감하였다. 

 

역사에는 광해군은 왕이라는 칭호도 받지 못한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지금 시각으로 볼 때는 현명한 지도자의 면모를 보인 훌륭한 왕이었음을 깨닫게 해 준다. 반면에 친명반금 정책을 고집한 서인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청나라의 침략으로 항복하여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는 치욕적인 역사를 이룬 것은 우리나라의 사대부의 고질적인 당파싸움의 병패와 한 나라의 외교정책과 국방정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인조의 업적(조선 후기의 유일한 법화 상평통보의 탄생)

 

인조 대의 업적으로는 명목화폐이자 동전인 상평통보를 주조하게 한 것이다. 이때 발행된 상평통보는 숙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유일한 법화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상평통보를 주조했던 상평청은 원래 흉년에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비축 곡물이나 자금을 관리하던 관청으로 지방의 구제곡물을 관장하도록 하며 활로를 모색하게 된다.

 

이는 고려 성종 대에 설치되어 세조 대까지 이어졌던 상평창을 계승한 것으로, 세조는 상평창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운영 법규까지 제정하였으나 국가 재정의 궁핍으로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했다. 그 때문에 선조 대에 와서 상평청으로 격상시켜 각 지방의 구제곡물을 관장토록 하며 활로를 모색하게 된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국가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그 기능을 상실하고 인조 대에 와서 대동법을 시행하던 경기청과선혜청에 부속되기에 이른다. 이때 비변사에서 운영하던 진휼청과 병합되어 구제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그리고 1633년에 마침내 상평통보를 주조하게 된다. 이후 1678년 숙종 4년에 조선은 상평통보를 유일한 법화로 채택하여 유통, 보급토록 공포하게 되고, 1894년 고종에 의해 정식으로 조선의 공식적인 법화로 활용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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