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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책봉과 왕자들의 반발
태조는 첫째 부인인 한 씨와의 사이에 6명의 왕자와 둘째 부인인 강 씨와의 사이에 2명의 왕자를 두었다. 태조는 둘째 부인 강 씨를 총애했다. 강 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녀 또한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출신의 개국공신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한 강 씨의 영향력은 마침내 세자 책봉에까지 미치게 된다. 태조는 첫째 부인 한 씨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 씨 소생인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했다. 1392년 8월, 방석의 나이 불과 11세였다. 혈기왕성했던 한 씨 소생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처사에 분개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가장 불만이 많았던 정안군 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방원은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개경의 최영 부대를 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정몽주를 개국 반대 세력을 제거했는가 하면, 왕대비 안 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이성계를 등위 시킨 주인공이었다.
따라서 공적을 따진다면 세자자리는 당연히 방원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조선 개국 후 그에게는 군권을 상실하고 개국공신 책략에서도 제외당하는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 세자 자리마저 강비의 소생인 방석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전개해야 했다.
제1차 왕자의 난
조선 건국 이후 개국공신들의 지위는 급격히 상승하였다. 정도전을 중심으로 추진되기 시작한 병권집중운동과 중앙집권하 정책은 권력구조 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개국공신 중에서 정도전의 지위가 크게 부상되었고 여타의 훈신과 왕실 세력들은 일선에서 소외되기 시작했다.
또한 정도전은 재상을 최고의 실권자로 하여 권력과 직분이 분화된 합리적인 관료 지배 체제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보아 왕도정치를 추구하였다. 정도전의 이러한 정치관은 신권(臣權) 중심의 왕정이라는 점에서 왕족들에게는 대단히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게다가 정도전은 세자 방석과 왕후 강 씨를 끼고 있었다. 조선 개국 이후 방원은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지만 정계 복귀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강비가 병으로 죽자 방원의 정계복귀 노력은 한층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그간 꾸준히 병권집중 운동을 벌여오던 정도전 일파는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정도전은 왕족들이 사병을 통수하고 있는 한 병권이 정부로 모아질 수 없다고 보았고, 방원은 사병을 잃을 경우 완전히 힘을 빼앗기고 말 처지였다.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방원은 극약처방을 내렸다. 한 씨 소생의 왕자들은 세자 책봉에 불만이 팽배해진 상태였고 게다가 계모 강 씨마저 이미 죽고 없는 상황이었다. 방원은 방의와 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기로 한다.
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 씨 소생의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 세자 방석과 그의 동복형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제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 한다.
조선 2대 왕 정종의 등극과 퇴위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 형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그다음 달인 1398년 9월에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고, 방과는 동생 방원의 뜻에 따라 왕으로 등극했다. 영안군 방과는 원래 왕위에 뜻이 없었다. 그러나 방원의 양보와 권유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개월 후에 태조가 물러나면서 왕위에 올랐다.
이로서 조선 제2대 왕, 정종인 것이다. 태조가 물러난 것은 자의보다는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해 있었고, 태조는 와병 중이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방원의 양보로 즉위한 정종이 비록 왕좌에 있긴 했으나 권력이 방원의 손에 집중되어 기 있었기 때문에 정종조 때의 정치는 거의 정안군 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되었다.
정종은 재위 시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는 그 나름의 보신책이었다.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방원과의 우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1400년 11월 마침내 방원에게 왕좌를 영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정비 정안왕후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정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는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다가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세종 원년에 63세로 일기를 마쳤다. 그의 능은 후릉으로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에 있으며, 능이 일반 왕족들이 묻히는 개성시 판문군에 있는 점으로 볼 때 그는 조선 중기까지 왕으로 대우를 받지 못한 듯하다.